아마추어 사회학도의 블로그

군 시절이었던 2010~2011년 쯤의 얘기다.

 

당시 나는 전라도 모처의 어촌마을에서 전경으로 복무하고 있었고, 매일 세 끼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하루는 마을에서 조업 나갔다 온 어민에게 살아있는 게 한 냄비를 받았다.(물론 받으면 안되지만 인사삼아 종종 받곤 했다.)

나는 그 게로 꽃게탕을 끓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처음 끓여보지만 물살이를 넣고 끓이는 매운탕류 음식들 레시피가 다 비슷비슷하니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문제는 게를 죽이는 것이었다. 내가 당시 아는 지식으로는 게를 죽일 때는 뜨거운 김에 쐬어서 기절시킨 다음에 송곳으로 찔러서 손질하는 거였나, 뭐 그런 식이었다. 시골 어촌에서 군복무하는 군바리가 그런 장비나 경험이 있을 리가 없고 딱히 방법을 물어볼 데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양념장이 들어간 끓는 물에 넣고 냄비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충분히 게가 익었을 즈음 뚜껑을 열었다.

 

나는 후회했다. 게들의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끓는 물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며 죽었을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물론 나는 공감능력이 결여된 인간이라 게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꽃게탕을 맛있게 잘 먹었다. 하지만 이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먹는 동물이 단지 고기나 생선이 아니라 살아있고 고통을 느끼는 생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소와 닭과 돼지를 먹고 생선을 먹으며 이것이 한때 살아있고 고통을 느끼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는다. 그것을 느끼고 나면 아마 한때 생명이었던 것을 입에 넣고 아무렇지도 않게 씹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엄마는 회를 뜨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그걸 보고 나면 생선의 고통에 공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예전에는 지역에서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같은 가축 전염병이 발생하면 공무원들을 동원해 살처분을 했다.(지금은 아니다. 용역을 준다. 물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시켜 저지르는 것일 뿐이다.) 신규직원 시절 처음 모셨던 계장님은 종종 살처분에 동원되었던 경험을 얘기해 주곤 했다. 우리들은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두려워, 그들은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라 단지 고기일 뿐이라고, 축산의 생산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아니다. 수많은 공무원들이 살처분에 동원된 뒤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다. 살처분에 나가 죽은 소들을 확인사살하기 위해 찔러본다면 이것이 단지 축산물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앞서 말했듯이 공감능력이 결여된 인간인지 어떤지 지금도 고기와 생선을 즐겨 먹는다. 고기를 끊어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지만 나흘 만에 그만두었다. 당시엔 군복무 중이라 주어진 식사를 먹어야 했고, 고기를 먹지 않으니 먹을 것이 없더라. 물론 지금이라면 잘 실천할 수 있겠지만 나는 완전한 채식은 하지 않는다. 단지 고기의 비중을 줄이고 채식 메뉴의 비중을 좀 늘린 것이 내가 하는 실천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물의 생명과 권리를 위한 측면도 있지만 환경적 문제(축산은 지구온난화에 영향을 끼친다)와 건강의 문제(고기는 고단백이지만 고지방도 동반해 섭취 방법에 따라 운동능력에 영향을 미친다)를 포함한 선택이다.

 

나는 음식을 남기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고기를 남기는 것을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재화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갖는다. 내게 고기를 남기는 것은 한때 살아있던 그들이 교환가치만을 가질 뿐 사용가치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매일 동물을 죽여 먹는 죄를 짓는다. 그 죄에 더해 죽여 놓고 먹지도 않고 버리는 더 큰 죄는 피하려고 한다.

 

나는 내 죄를 직시하면서도 매일 무감각하게 새로운 죄를 짓는다. 내가 생각하는 사악함은 무감각에 본질이 있다.  나의 사악함과 모순됨이 대략 이러하다.